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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2~3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폭발적인 전성기를 보여준 선수다. 너무 특이한 외모와 플레이 스타일로 인해 외계인이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로 인상적인 외모를 지녔다. 발롱도르(2005년) · FIFA 올해의 선수(2004,2005년) · UEFA 올해의 선수(2006년)를 연속 수상하는 등 누구보다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아직까지도 그렇게 짧은 기간에 강렬한 임팩트를 준 선수는 없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름 Ronaldinho는 한국어로 풀이하자면 작은 호나우두. 많이들 알지만 본명은 호나우두 지아시스 모레이라(Ronaldo de Assis Moreira)로 호나우두다. 다만, 선배 중에 호나우두가 있기 때문에 작은 호나우두라는 의미의 호나우지뉴로 불리게 된 것. 여담으로 과거 국내에서는 "호나우딩요"라고들 많이 불렀지만, "-dinho"는 딩요보단 지뉴(ˈdʒĩɲu)가 더 원어에 가깝기 때문에 호나우지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호나우지뉴는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8살때 갑자기 아버지가 운명했지만 호나우지뉴의 형인 호베르투가 프로 팀인 그레미우와 계약한 덕분에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다만 형은 부상때문에 일찍 선수생활을 접고 호나우지뉴의 에이전트로 활동했다.
처음 축구선수로서 알려진 것은 13세 때 지역팀과의 경기에서 23골(혼자서 23대0 게임에서 23골 전부를 기록) 을 넣은 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이다. 이후 자기 형이 계약했던 그레미우와 계약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1997년 U-17 대회에서 세계에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후 프랑스의 명문클럽인 파리 생제르망으로 이적하는데 여기서 호나우지뉴는 나이지리아의 흑보석 오코차의 플레이를 보고 푹 빠지게 되면서 그의 플레이에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사실 호나우지뉴는 브라질 리그때만 해도 우리가 생각할 정도로 개인기를 화려하게 펼치는 선수는 아니었다.
호나우지누는 첫 훈련 세션에서 오코차의 플레이를 본 당시를 회상하며 "오코차가 하프 라인 부근부터 다양한 개인기를 펼쳐 4명을 제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의 플레이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라고 표현했다.
첫 훈련이 끝나고 호나우지뉴는 곧 바로 오코차에게 가서 몇몇 개인기를 알려달라 했고,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에 큰 변화를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코차는 사이드 지역에서, 중앙 지역에서 상황 별로 쓸 수 있는 개인기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줬고 그리고 지금의 '화려한 호나우지뉴'가 탄생하게 됐다. 만약 호나우지뉴가 오코차를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아는 외계인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도 브라질 대표로 출전하여 브라질의 우승에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을 했고 월드컵 이후 인지도와 몸값이 확 높아졌지만, 정작 소속팀인 PSG에서는 루이 페르난데스 감독과의 불화로 인해 출전기회가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유럽의 명문클럽들이 그를 노리고 있었고 2003년 여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영입의사를 밝혀 맨유로의 이적에 99%의 진척률을 보였다가 결국 02/03시즌 최악의 부진으로 회장과 감독이 바뀐 FC 바르셀로나가 그를 영입하게 됐다. 그리고 호나우지뉴도 바르샤에서 최전성기를 보여주게 된다.
바르샤가 호나우지뉴를 영입한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당시 호나우지뉴의 이적료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바르샤가 여유 자금을 모두 써야 하는 2,500만 유로였다. 호나우지뉴는 맨유가 더 큰 금액을 제시했지만 바르샤를 선택했고 이후 팀을 정상으로 이끌며 역대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 많은 브라질 선수들이 잉글랜드에서 환경과 문화적인 차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찌감치 떠난 것에 비해 바르샤는 이미 호마리우, 호나우두, 히바우두 등의 브라질 스타들이 맹활약을 펼치며 터를 잡아 놓았던 클럽이었고 이는 호나우지뉴가 스페인을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FC 바르셀로나에서의 틀이 잡히기 전인 첫 시즌 03/04시즌 초반에는 호나우지뉴 활약도 그저 그랬지만, 후반기에 4-3-3포메이션을 가동하면서 3톱의 왼쪽에 배치, 프리롤로 기용되면서 후반기 엄청난 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됐다. 이후 그는 22골 14도움을 기록하면서 본격적으로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가 되기 위한 초석을 다졌다.
04/05시즌엔 바르샤가 여름 이적시장 때 사무엘 에투, 안데르송 데쿠 같은 정상급 선수들을 영입해 호나우지뉴에게 날개를 달아줬고 그에 힘입어 팀은 99년 이후 6년만에 프리메라 리가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었다. 게다가 그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당시 주제 무리뉴 감독의 지휘 하에 최강을 자랑하던 첼시와 16강에서 맞닥뜨렸는데, 2차전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수비진과 체흐 골키퍼가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던 대단한 골을 넣기도 했다.
비록 팀이 패배해 챔피언스 리그 16강 탈락에 그쳤으나, 한 해 동안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2005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05/06시즌에 호나우지뉴는 경력에 정점을 찍었다. 2005년 11월 19일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는 혼자 2골을 기록하는 등 독보적인 활약으로 팀을 3-0 승리로 이끌면서 상대팀 레알 마드리드의 몇몇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고, 2006년 4월 1일에 열린 안방에서의 엘 클라시코까지 5경기 연속골, 6경기 모두에서 공격 포인트를 올리면서 또다시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공교롭게 또다시 무리뉴의 첼시와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엔 FC 바르셀로나가 복수에 성공하면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고 8강에서 벤피카, 4강에서 AC 밀란, 결승에서 아스날 FC를 차례차례 꺾고 92년 이후 첫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FC 바르셀로나에 안긴다.
이 세 시즌 동안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실로 경이로웠다. 묘기 수준의 개인기를 매 경기 보여주면서도 자기 중심적 플레이가 아닌 팀에 보탬이 되는 플레이를 하여 세계인의 뇌리에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레알 마드리드와의 클래식 더비에서, 하프 라인부터 치고 나가 레알 수비수들을 농락한 골을 두 번이나 넣은 것인데 레알 홈 관중들조차 허탈한 표정으로 기립박수를 쳐줄 정도였다.
하지만 전성기 때 외계인 모드였던 딩요도 사람인지라 꼭 막히는 수비수가 한 두명씩 있었다. 대표적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센터백이였던 이반 엘게라, AC 밀란의 야프 스탐이 있었다. 이 중 스탐은 05-06 챔스 4강전에서 딩요를 말 그대로 꽁꽁 묶어버리며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는 맹활약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분간 호나우지뉴의 전성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호나우지뉴의 아이들'의 전성시대는 2년만에 끝났다. 라리가-수페르코파-챔스 3관왕으로 정점을 찍던 05/06시즌 막판과 2006 독일 월드컵에서의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예전에 비해 상당히 정적으로 변모했고 화려한 드리블보다는 킬패스만 노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워낙 외계인인지라 일시적인 컨디션 저하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06/07시즌에 이르러 FC 바르셀로나는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골잡이 사무엘 에투의 장기부상으로 시작되면서 팀은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호나우지뉴는 팀에서 요구하는 다이나믹함을 점점 잃어가며 챔피언스 리그에서 16강 탈락. 프리메라 리가에서도 막판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역전 당하면서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07/08 시즌부터는 본격적으로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호나우지뉴는 팀 전체 훈련에 1년 동안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고 나이트 클럽에만 나갔다. 그로 인해 늘어나는 뱃살에 움직임은 둔해졌고 자율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던 감독인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이러한 호나우지뉴에 대해 통제를 가하지 못해 팀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어갔다.
에이스의 몰락으로 결국 팀은 레알 마드리드에게 2년 연속 타이틀을 내줬고 당시 신성 메시를 새로운 에이스로 점찍은 FC 바르셀로나는 시즌 이후 그를 이적시장에 내놓게 된다.
가치가 추락한 호나우지뉴였기에 이적이 될까 싶었지만 AC 밀란에서 그의 영입을 추진하여 성사됐다. 베를루스코니는 그를 여전히 캄피오네라면서 영입했지만, 08/09 시즌의 호나우지뉴는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9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 CF가 AC 밀란의 에이스였던 카카를 영입해갔고 호나우지뉴는 카카의 공백을 메꿔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됐다. 예전의 다이나믹함은 사라졌지만 살이 약간 빠지고, 볼키핑과 특유의 패스가 살아나주면서 밀란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으며, 전성기에 보여주던 특유의 화려한 드리블 돌파도 간혹 보여주기도 했다.
산 시로에서 치러진 2009/2010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는 선발로 나와서 맨유의 수비수 하파엘, 조니 에반스, 리오 퍼디난드를 혼자서 제치고 1골 1어시를 올리는 그야말로 외계인의 복귀라 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팀 전체적으로 경기력이 밀리며 맨유에게 3골을 내주며 패배했다. 스피드를 제외한 경기력이 엄청나게 돌아온 모습을 보이며 팬들이 호나우지뉴의 기대를 갖게 했다.
그리고 10-11시즌 개막전, 그야말로 날아다니면서 팀의 4-0 대승을 이끌었다. 체중도 전성기 시절과 1kg 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았고 세리에 A 어시왕을 찍었던 09-10시즌보다 드리블이 민첩해지고 활동량도 늘어났다. 하지만 시즌이 지나면서 서서히 폼이 떨어졌고 결국 벤치만 달구다가, 안토니오 카사노의 영입이 확정되면서 유럽리그를 떠나 브라질 리그로 이적했다.
브라질로 돌아가게 되면서 사실상 월드 클래스 선수로서의 커리어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허나 더 나아진 모습을 보이면서 역시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고, 이런 클럽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국가대표에 다시 한 번 발탁되기도 했다. 2014년 1월엔 '2013 남미 올해의 축구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이후 2014 브라질월드컵 대표팀에서 낙마하면서 특별한 반전없이 남미의 클럽들을 전전하다가 은퇴하게 된다.
호나우지뉴는 국가대표에서도 짧지만 큰 족적을 남겼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도 브라질 대표로 출전하여 대회 내내 호나우두 - 히바우두 투톱의 밑을 받치면서 브라질의 3R(Ronaldo, Rivaldo, Ronaldinho)로 불리면서 맹활약을 했다.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는 수비진을 농락하며 동점골 어시스트, 역전 프리킥골 등 원맨쇼를 펼치며 브라질의 우승에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경기에서 가린샤 클럽의 명예로운 5번째 회원이 된다.
하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특별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이후 자기관리에 실패하면서 2010년 월드컵에 끝내 뽑히지 못했다. 2013년 국가대표에 다시 선발됐지만 잉글랜드와의 A매치 평가전에서 PK를 실축하면서 역적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스콜라리 감독도 믿음으로 꾸준히 경기에 출전했고 그 이후 남미의 챔피언스 리그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하면서 본인 또한 대회 MVP로 선정되면서 부활을 날개짓을 펼쳤지만 결국 2014년 자국 월드컵에 뽑히지 못했다.
전성기의 호나우두는 알아도 못 막았지만, 호나우지뉴는 정말 뭘할지 몰라서 못 막았다. 볼을 다루는 능력과 돌파하는 드리블, 시야, 패스와 연계능력, 마무리능력까지 완벽하게 갖춘 드리블러형 공격수이자 플레이메이커였다.
전성기 호나우지뉴를 상징하는 것은 단연 화려한 개인기. 호나우지뉴의 상징과도 같은 기술인 플립 플랩을 비롯, 헛다리 짚기 · 라 크로케타 · 마르세유 턴 · 스쿱 턴 등 다양한 개인기를 최상급으로 구사했으며, 공을 공중으로 튕기면서 수비수들을 농락하는 플레이도 즐겨했다. 단순히 기술만 뛰어난 게 아니라 신체능력도 탁월했는데, 몸의 탄력과 유연성이 엄청난 덕분에 동작이 큰 개인기를 구사하고도 다음 동작으로 빠르고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고, 웬만한 수비수들을 압도하는 피지컬과 스피드도 가지고 있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주로 수비벽을 허무는 돌파에 초점을 두고 빠른 드리블과 개인기를 사용해 적팀 수비수를 깨부순뒤, 동료에게 마무리를 양보하는 식의 플레이를 많이 하였다. 골욕심이 그리 많은 선수는 아니었고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나 윙어로 뛰다보니 마무리보다는 공격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넓은 시야와 축구지능까지 굉장히 뛰어난 편이라, 볼을 어떻게 움직이고 누구에게 패스해야 공격이 쉬워지는지 잘 알고 있는 선수이다. 누구도 구사하지 못하는 탈지구급의 드리블에 킬패스까지 겸비했으니, 상대팀 수비수들은 호나우지뉴를 막다가 패스 한 방에 골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가장 역대급 재능이라고 할 수 있는게, 공을 감지하는 몸의 감각인데, 등, 뒤꿈치, 어깨 등 다른 개인기가 좋은 선수들도 잘 쓰지 않는 신체부위를 가지고도 기가 막힌 패스를 해냈다. 게다가 그는 원터치로 전달하는 웬만한 패스에 시선을 잘 두지 않았다. 물론 공이 오는 각도와 튕겨나갈 방향을 잘 예측한 플레이긴 했지만 신통방통한 움직임은 그가 외계인으로 불리는데 큰 일조를 했다. 또한 전성기 시절엔 공을 위로 띄워 트래핑을 하든 드리블을 하든 속도가 줄지 않는 엄청난 능력을 선보였다. 거기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탁월해 템포를 잡아먹지 않으면서 패싱력까지 갖춰 빠른 역습중에 킬패스까지 뿌릴 수 있는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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