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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과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21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다.
1992년, 앙리는 클레르 퐁텐 축구 아카데미에 입단해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듬해인 1993년 AS 모나코 유스팀에 들어갔다. 이때 모나코의 감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르센 벵거였다.
앙리의 첫 프로 경기는 1994년 8월 31일 OGC 니스와의 경기였다. 다음달인 9월 17일에 벵거 감독이 해임되었지만 이후 감독들에게도 역시 꾸준히 신뢰를 받았고 1996-97 시즌 AS 모나코가 리그와 컵 더블을 하며 앙리는 커리어에서 첫 우승을 기록한다. 자국에서 열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윙 포워드로 출전하여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하면서 프랑스의 첫 월드컵 우승에도 기여한다.
98년 월드컵의 우승 이후 1998-99 시즌 중반까지 다소 부진했지만 1999년 1월에 겨울 이적 시장에서 세리에 A의 명문 유벤투스에서 러브콜이 왔고 앙리는 모나코에서의 4시즌 반 동안 141경기 28골 37어시스트라는 기록을 남기고 유벤투스로 향하게 된다.
델 피에로가 시즌 아웃을 당하며 리그에서 부진하던 유벤투스는 1250만 유로라는 거금을 들여 앙리를 데려왔는데 앙리는 전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앙리의 장점은 탁월한 돌파와 스피드를 통한 득점 능력이었는데 유벤투스에서는 앙리를 스트라이커가 아닌 전문적인 윙으로만 쓰는 전술적인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모나코에서 활약할 당시 앙리는 스트라이커였고 데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새로 부임한 인물이 카를로 안첼로티였는데 루치아노 모지에게 앙리가 스트라이커 롤을 소화할 수 있냐고 물어보고 모지가 그냥 윙만 뛸 줄 안다길래 판매에 찬성을 했다. 후에 안첼로티는 자신이 가장 후회하는 게 이때 앙리를 스트라이커로 써보지도 않고 팔아버린 것이라고 회상을 했다.
유벤투스에서 앙리는 반 시즌 동안 16경기 3골이라는 다소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 팬들도 월드컵 거품이 껴있다고 비판을 가했고 앙리는 실의에 빠져있었다. 이 6개월은 앙리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기였고 그 해 유벤투스도 끝내 리그에서 6위를 기록했다.
위기에 빠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은 프로 데뷔의 은사인 아르센 벵거였다. 레알 마드리드로 니콜라 아넬카를 보내며 2000만 파운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돈을 거머쥐고 있던 그는 의외로 세리에 A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앙리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아스날의 감독은 자신을 데뷔시켜준 벵거였고 이미 비에이라나 프티같은 프랑스 국대 동료도 있어서 적응이 어렵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앙리를 가장 잘 서포트해줄 수 있는 데니스 베르캄프라는 테크니션도 있었다. 게다가 프리미어리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스피디한 리그여서 스피디한 앙리와 궁합이 잘 맞았다.
아스날에서 앙리는 4차례의 득점왕을 차지했고, 03/04, 04/05, 05/06시즌에는 3연속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EPL 득점왕은 판 니스텔로이가 단 한 번 페널티킥을 몰아차면서 25골로 간신히 득점왕을 한 2002-2003 시즌 이외에는 모두 앙리가 차지했다. 2002-2003 시즌도 득점왕만 못했을 뿐 PK골도 없이 24골, 20어시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만들어냈다. 이 20-20은 앙리 이후 현재까지 축구 역사상으로도 존재하지 않으며 얼마나 위대한 기록인지 알 수 있다.
아스날도 앙리의 활약 속에 이 기간 동안 2번의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전설적인 아스널의 무패우승도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2000년대 중반까지 앙리는 말 그대로 아스날의 왕이자 EPL의 왕으로 군림했으며, 특히 아스날에서의 기록은 언터처블 그 자체였다. 앙리가 아스날에서 기록한 총합 226골은 아스날 클럽 역사상 최다골이었다.
2005-2006 시즌에는 주장 완장을 달고 팀을 이끌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의 강호들을 차례로 꺾으며 결승에 진출했다. 특히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진을 농락하며 기록한 골은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FC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에서는 옌스 레만이 18분 만에 퇴장당하면서 수적 열세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솔 캠벨이 선취골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지만 끝내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이 시즌의 활약으로 이후 FIFA/FIFPro 월드 11에 공격수로 뽑히기도 했다. 시즌 후 아스날의 무관으로 인해 바르셀로나로의 이적설이 떠돌았으나, 앙리는 4년 재계약을 맺었고 그렇게 아스날의 전설로 커리어를 이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결국 앙리는 호나우지뉴, 메시, 에투가 있는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 프리미어리그, FA컵, 유럽선수권대회, 월드컵 등 거의 대부분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앙리에게 남은 것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었고 아스널은 신축 경기장 이전으로 인한 재정 긴축정책 때문에 당분간 챔스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벵거도 앙리의 피지컬이 떨어지고 있었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대한 열망을 알고 있었기에 이름값에 비해 싼 가격인 2천 4백만 유로에 이적을 허락했다. 다음 시즌 구상하는 새로운 팀에 앙리가 적응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하며 그를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앙리는 2007년 6월 25일 이적료 2400만 유로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했고 바르셀로나 입단 이후 등번호는 기존의 14번을 그대로 달았다. 9월 19일에 펼쳐진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1라운드 리옹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면서 이적 후 첫 골을 넣었고 1주 뒤, 레반테와의 리그 경기에서 바르사에서의 첫 해트트릭을 달성하면서 클래스를 증명했다.
그 해 리그 30경기 12골을 기록하고 챔스에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활약을 보였으나 리그와 챔스 둘 다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팀이 침체했던 시즌이었으며 본인 또한 아스날 시절만큼의 압도적인 면모는 보여주지 못하면서 무관에 그쳤다.
2008/09 시즌에는 폼이 더 올라오면서 에투, 메시와 함께 최강의 공격진을 구축했다. 앙리의 움직임 자체는 예전 전성기만 못했지만 골 결정력은 살아 있어서 바르셀로나의 왼쪽 윙어로 출전하면서 티에리 앙리-사무엘 에투-리오넬 메시의 공포의 H-E-M 삼각편대를 구성하면서 셋 다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줬다.
앙리는 특히 엘클라시코 같은 큰 경기에서 맹활약하며 과르디올라의 팀 구상에 꼭 들어가는 선수가 됐다. 리그에서 29경기 19골을 기록하며 전 시즌보다 나은 모습을 보였고 챔스에서도 6골을 기록했다. 리그와 국왕컵을 우승하고 챔스 4강에서 첼시를 상대로 힘겹게 이겨 결승에 진출했다.
결국 결승전에서 박지성이 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20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마지막 대업을 이뤘다. 앙리는 이 시즌 26골을 기록하면서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을 넘은 6관왕이란 대업에 기여했고 이 때의 공격진은 지금까지도 바르샤 역사상 MSN 다음 최고의 공격진으로 손 꼽힌다.
하지만 2009/10 시즌에는 피지컬 하락에 따른 노쇠화의 진행과 신예들의 성장으로 자리를 잃어 모든 대회 합쳐서 10골도 기록하지 못했고 2010년 바르셀로나가 스페인 국가대표 공격수인 다비드 비야를 영입하면서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앙리는 2010년 여름, FC 바르셀로나에서 미국 MLS의 뉴욕 레드불스로 이적한다.
뉴욕 레드불스에서도 득점력으로 보여주고 주장까지 하며 클래스를 보여줬지만 유럽 최고 무대에서 뛰던 앙리에게는 너무 작은 무대였다. 결국 2012년 1월 아스날로 2개월간 깜작 단기 임대로 5년 만에 자신의 최전성기를 누렸던 팀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고 짧은 기간동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증명했다.
앙리는 이 마지막 임대기간을 포함해 아스날 통산 376경기 228골 92어시스트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고 다시 미국의 돌아가 활약하다 2014 MLS 시즌 종료 이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클럽에서만큼 국가대표에서의 경력도 화려하다. 1996년 청소년 대표로 유럽 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 트로피를 안겼고, 1997년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하며 96년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망주상, 97년 프랑스 프로축구협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망주상을 휩쓸었다.
자국에서 열린 1998 월드컵에 참가해 앙리는 3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됐고 조국에 첫 월드컵 우승을 안겨줬고 UEFA 유로 2000에서는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면서 3골을 기록해 또 하나의 메이저 대회 우승을 견인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는 조별탈락이라는 악몽을 맛봤지만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토고와 한국을 상대로 각각 한골을 기록, 8강 브라질전에서는 지네딘 지단의 세트피스 크로스를 논스톱 다이렉트 슛으로 득점에 연결하여 호나우두의 커리어 마지막 월드컵을 종료시켰고, 4강 포르투갈전은 문전상황에서 PK를 유발하여 결승골을 유도하면서 결승전까지 팀을 올려놨다. 이 대회 종료 후 클로제와 함께 월드컵 베스트 XI에 뽑히기도 했다.
이후 국가대표에서의 꾸준한 활약으로 센추리클럽에도 가입했고 2007년에는 미셸 플라티니가 가지고 있던 국가대표 최다골 타이틀을 경신했다. 하지만 2010 FIFA 월드컵 유럽 본선에서 탈락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로서는 아쉽게 국가대표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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