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택과 함께 유이하게 LG 트윈스의 암흑기 시작과 끝을 버텨낸 프랜차이즈 스타다. LG 트윈스에서만 통산 700경기에 출장한 유일한 우완투수이자 원 클럽 맨으로 한 때 전설로 불리던 메이저리거 로저 클레멘스의 묵직한 강속구와 투구폼이 닮았다고 하여 '로켓'이란 별명을 가지게 됐다. 본래 영남중학교 때까지 외야수였고 서울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투수로 전향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경기고등학교의 야구명문 부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학하게 됐는데, 언더핸드에서 정통파 오버핸드로 투구 폼까지 교정하면서 곧 전국 레벨의 투수로 성장하게 되면서 경기고 2학년 때인 1999년에 박찬호 야구 장학금도 받게 됐다고 한다. 이동현의 원 맨 팀이나 다름없던 경기고등학교는 그가 3학년이던 2000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
LG 트윈스의 암흑기에 홀로 투수진을 이끌었던 에이스다. 메이저리그 유턴파로 LG 트윈스에서뿐만 아니라 국가대표로써도 맹활약을 펼쳐 '봉의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봉중근은 신일고 시절 투수로서 뿐 아니라 타자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선수였다. 1997년에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4게임 연속 홈런, 타율 5할을 기록하며 최우수선수가 되었다. 같은 해 청룡기에서는 타율 .688이라는 기록을 보여주면서 MVP, 타격, 타점왕을 휩쓸기도 했다. 1997년 신일고의 황금 클린업 트리오 봉중근-안치용-김광삼은 국내 4개 대회에서 신일고의 3관왕을 이끌었고 세 명은 최우수타자, 최우수선수, 최우수투수, 대회 MVP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이 놀라운 활약으로 봉중근은 97년 당시 고3의 신분으로 ..
2003년부터 2014년까지 LG 트윈스에서 주로 2루수와 유격수로 활약한 선수다. 성남고등학교 시절 타격 소질이 있고 장타력도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남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형 유격수로 촉망받았다. 고3 때 서울시 춘계리그 25타수 19안타에 빛나는 타격 재능과, 이보다 뛰어나다고 평가받던 수비적 재능으로 서울 연고 구단의 주목을 받았다.스카웃 당시 주전 유격수 김민호가 급격히 하락세를 타던 두산이 이미 입단한 성남고 출신 고영민과의 키스톤 시너지를 위해 더 관심을 보였고, 3억 8천만원의 계약금을 제시했다. 그러나 영원한 잠실 라이벌인 LG 역시, 유지현의 2루전향과 동시에 유격수 공백을 물빠따인 권용관으로 메우던 상황이었기에 타격이 좋은 박경수로 메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4억 3천만원이라는..
2009년 이진영과 함께 FA로 LG 트윈스에 넘어와 구멍이던 3루수 자리를 해결해주면서 꾸준한 활약을 보여줬다. 이진영에 비해 들쑥날쑥함도 적었고 꾸준한 활약을 보여줬기 때문에 LG 팬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던 선수다. 3할 가까운 타율에 한 시즌 평균 10개 내외의 홈런과 매년 100개 이상의 안타를 보장해주던 중거리형 타자였고 야구센스가 뛰어난 편이라 1번타자부터 9번타자까지 어느 위치에 갖다놔도 준수한 활약을 해주던 선수다. 4차원에 가까운 행동을 많이 했고 특유의 기행 때문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편이다. 그라운드에서 돌발 행동을 자주해 정똘, 정성병자, 똘쥐 등의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해 현대 유니콘스, 히어로즈를 거쳐 LG 트윈스로 넘어왔다. 국가대표에..
2009년부터 2015년까지 LG 트윈스의 우익수로 활약했던 선수다. SK 와이번스 시절 2006 WBC에 출전해 놀라운 수비 활약으로 국민 우익수라는 별명도 얻고 병역특례를 받았다. 2년 연속 SK 와이번스 우승멤버로 활약하면서 SK의 전설로 남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FA 때 LG 트윈스와 함께하게 됐다. 이전까지 거액의 FA 흑역사를 쓰고 있던 LG 트윈스에 흔치 않은 성공사례를 남긴 선수 중 하나다. 이병규가 KBO리그에 복귀하기 전에 잠시 팬들이 응원가를 잠깐 사용했을 때도 있었지만 이후 이병규 응원가는 이병규를 위해 쓰지 않겠다며 다른 응원가를 사용했다. 이진영을 영입할 당시에 LG 트윈스는 그만한 수비능력이나 타격능력을 가지고 있던 타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많은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다..
LG 트윈스 암흑기 리드오프, 4년 연속 도루왕 적은 홈런 수와 많은 도루로 대표되는 리드오프 타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선수. LG 트윈스 프랜차이즈 스타로 2013년 11월 17일 KIA 타이거즈로 FA 이적할 때까지 많은 인기를 얻었던 선수다. LG 트윈스를 대표하는 세련된 이미지와 빠른 다리로 슈퍼 소닉이라는 공식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전성기 때 60도루, 4년 연속 도루왕으로 명성을 떨쳤고 슈퍼소닉~ 이대형 안타! 오오오오~ 안타!라는 응원가는 이대형의 도루와 함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잘생긴 얼굴과 날씬하고 길쭉한 몸매를 갖고 있으며 빠른 발을 가지고 있어서 여성 팬들과 어린이 팬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다. 어깨만 제외하면 대단히 좋은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루 능력과 수비 능력..
LG 트윈스의 상록수(常綠樹) 원 포인트 릴리프의 대가 KBO 투수 출장 기록 단독 1위(901경기) 대표적인 대기만성형 선수로 김성근 감독을 통해 프로에서 눈을 뜬 후 주로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 등판하며 쏠쏠한 활약을 했고, 꾸준한 몸 관리로 21시즌 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 갔다. 투수 최다 출장 기록 단독 1위라는 대기록의 보유자다. 2000년 LG 이적 2년차 때의 사진. LG 이적 첫 해인 1999년에는 60번을 달았으나, 당시 14번을 달던 심재학이 1999년 말 트레이드를 통해 현대로 이적하자 심재학이 달던 14번을 달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였을 때 최동수와 함께 뒤늦게 프로에서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LG에서 그는 좌타자 전문 원 포인트 릴리프 보직을 받는다. 이적 첫 해인 19..
1998년 1차 지명을 받아 LG 트윈스에 입단하였다.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뛰어난 도루 저지 능력을 보여 주어 LG 트윈스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포수 스타로 자리매김하였다. 데뷔 첫 시즌을 마치고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해 병역을 해결했다. 대학시절 국가대표 포수출신으로, 고려대출신의 라이벌인 진갑용과 쌍벽을 이루는 재목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LG트윈스의 주전포수이던 김동수의 팀내 위치를 위협했고, 김정민과의 백업포수 경쟁에서 승리. 그리고 앉은 자세에서 2루로 도루하는 주자를 잡아내는 강견을 자랑하며 일찌감치 주력 포수로 자리잡았다. 2007년 2할대 타율, 13홈런, 73타점의 성적을 바탕으로 LG 트윈스와 최대 4년 간 34억원의 FA 계약을 맺었으나 저조한 성..
LG 트윈스 부동의 외야수이다. KBO 리그의 수준급 좌타자이다. 수비시 타구판단이 수준급이며 골든 글러브 외야수 부문 최다 수상(6회)을 했다. 1997년에 타율 3할 5리, 23도루로 신인왕을 차지하며 데뷔했다. 1999년 타율 3할 4푼 9리의 고타율과 30홈런 31도루를 기록하며 30-30클럽에 가입했다. 이로써 잠실야구장의 유일한 30-30 클럽 보유자가 되었다. 또한 192안타로 최다 안타왕에도 올랐다. 2005년에는 타율 3할 3푼 7리를 기록하며 생애 첫 타격왕에 올랐다. 김성근이 백인천 이후로 4할 타자가 다시 나온다면 그 주인공은 그일 것이라고 할 정도로 타격에 재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상으로 출전을 거의 못해 2할 7푼 9리에 그친 2003년을 제외하면 언제나 2할 9푼 ~..
1990년 드래프트에서 LG 트윈스에 지명되었다. 이 해의 드래프트는 서울출신의 국가대표 출신인 거물급 대졸 3루수 두명이 화제가 되었다. 한명은 건국대 출신의 송구홍, 또 한명은 한양대 출신의 황일권. 그러나 대체적인 평가는 송구홍이 황일권보다는 한 수 위였다. 그래서 모두들 예상하기를 당시 OB 베어스가 그렇게 한이 맺혀있는 주사위에서 승리한 쪽이 송구홍을, 패한 쪽이 차선책으로 황일권을 가져가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운명의 연고지 우선지명의 날. 당시 합의대로 두 팀의 대표는 주사위를 굴렸고 주사위의 결과는 역시나 LG 트윈스의 승리. 결국 LG 트윈스는 예상대로 송구홍을 지명했고, OB 베어스는 황일권을 지명했다. 전년도 우승팀 프리미엄에 금상첨화의 기대를 받고 입단했건만 첫 해에는 프로 적응에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