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청룡-LG 트윈스에서 활약했던 우완 투수. 현역 시절 등번호는 35번. 성대 시절만 해도 한희민에게 밀린 무명의 파이어볼러였으나, 190cm의 큰 체구를 앞세운 강속구 투수라는 장점을 본 김동엽 당시 MBC 청룡 감독이 1차 지명자로 낙점했다. 김동엽 감독이 김태원을 언급하면서 "우리 팀에는 선동열급의 신인이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나 새가슴이라서 주자만 나가면 투구가 흔들렸다. 김태원의 부진은 김동엽 감독이 잘리는 데 일조했다. 게다가 방위 복무 등으로 인해 4년 동안 잉여 전력이었다. 전지훈련 소개에서 감독 인터뷰를 하면 "올해는 김태원이 기대된다. 김태원만 활약하면 우승할 수 있다." 는 말을 듣는 게 연례행사였다. 그러다가 MBC에서 LG로 바뀐 동시에 백인천 감독의 ..
1990년대 신바람 야구의 선봉장 포지션은 투수. 야간 경기에 강해서 "부엉이"라는 별명이 있다. LG 트윈스가 "신바람 야구"를 이끌며 리즈 시절 승승장구하던 1990년대의 에이스로, 뒤늦게 터진 김태원, 신인 이상훈, 소방수 김용수와 함께 LG의 마운드를 이끌었다. 최고 145km/h 내외의 빠른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었지만 전성기 때에는 체인지 오브 페이스를 적절하게 구사하면서 완급 조절에도 능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은 야구부가 존재하지 않는 명지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문제는 명지고 야구부가 당시 고등학교 야구부들 중에서는 약체였다는 것. 그래서 고려대학교로 진학하고 난 뒤 투타를 오가며 열심히 뛰었음에도 선동열-안언학-한영준 등의 더 힘세고 강했던 유망주급 동기들에 묻혔다. 거기..
LG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MVP이자 통산 100승 - 200세이브의 기록 보유자 LG 트윈스의 레전드.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한결같이 한 팀을 지켜 온 모습에서 따 온 노송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명선수 출신이 지도자로 성공할 수 없다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야구인이다. 동대문중학교 1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동대문상고와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팀인 한일은행을 거쳐 1985년 계약금 2,300만원에 MBC 청룡에 입단했다. 1984년에는 이상군, 선동열, 류중일 등과 함께 LA 올림픽에 참가했다. LG 트윈스 최초의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41번)이며, 한국프로야구에서 최초의 200세이브-100승을 거둔 선수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등번호 41번은 원래 원하던 번호인 14번..
역대 포수 최다 골든글러브, 포수 최초 2000경기 출장에 빛나는 1990년대 최고의 포수 2009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으며, 2010년부터 넥센 히어로즈의 배터리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KBO 리그 역사상 이만수, 박경완과 더불어 3대 포수로 불릴 정도로 꾸준했고, 좋은 성적을 기록한 포수. 1980년대는 이만수, 1990년대는 김동수, 2000년대는 박경완의 시대라 불렸다. 등번호는 백인천이 감독으로 있었던 1990~1991년까지는 12번, 1992년 이후로는 어느 팀을 가더라도 계속 2번. 최고의 투수 리드로 정평이 나 있었고 타격도 수준급이었으며, 넓고 깊은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 덕에 홈런에서 손해를 보았지만 팀내 홈런왕에 오른게 4차례일 정도로 장타력이 출중했다. KBO ..
1990년대 LG 트윈스의 신바람야구를 상징하는 선수이자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했던 좌완 파이어볼러. 대한민국 투수 중에서 구대성, 박찬호, 김병현, 임창용, 오승환과 함께 '한, 미, 일 프로 무대를 모두 경험한 선수이자, 한미일 3개국 프로야구 1군 경기에 모두 등판했던 최초의 선수이다. 구대성은 2005년 미국에 진출하며 이 기록을 달성했고 박찬호는 2012년, 임창용은 2013년, 오승환은 2016년이었다. 김병현은 일본에서 1군 기록이 없다. 지진만 맞았다 아울러 한미일 3개국 1군 무대에 모두 섰던 날 기준으로 유일하게 만으로 20대에 달성하였다. 등번호는 47번(LG 1993~1997, 2002~2003 & SK 2004) - 17번(주니치) - 40번(보스턴). 선수로 활동했던 11년 중 대한..
큰 경기에 강하고, 수비가 뛰어난 1루수. 당시 등번호는 62번이었다. 신인 드래프트 순위가 전체의 뒤에서 2번째였을 정도로 신인 드래프트 당시만 해도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94시즌을 대비하던 LG 트윈스의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 당시 타격인스트럭터로 초빙되어 캠프에 머물던 일본프로야구의 레전드 장훈이 "넌 타격 폼에 특별한 단점은 없다."면서 서용빈의 부드러운 스윙을 칭찬하게 되는데, 이에 피그말리온 효과가 발휘되어 서용빈은 자신의 타격에 확신을 가지고 훈련에 매진할 수 있게 되고, '미스터 LG' 김상훈의 이적으로 공백이 된 1루 자리에 경쟁자인 허문회를 제치고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응답하라 1990 - LG 우승의 주역, 서용빈과 허문회의 '엇갈린 운명'. 신인 데뷔 시즌('..
데뷔하자마자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고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장식한, 그야말로 시작과 끝이 화려했던 선수다. LG 트윈스 등번호는 7번을 달았다. 엄청나게 빠른 배트스피드와 호쾌한 타격폼으로 캐넌히터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이 별명은 그의 타구가 마치 캐넌처럼 힘이 넘치는 것에서 비롯된다.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는 궤적이 아닌, 낮고 강하게 관중석을 향해 날아가는 라인 드라이브성 홈런이 전매특허였다. 일명 캐넌포. 훌륭한 선구안으로 출루율이 타율보다 1할 높기 때문에 "사륜안"이란 별명도 있다. 은퇴한 시점에 통산 사사구 역대 3위였다. 1994년 2월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LG 트윈스에 입단했다. 입단 과정에서 오키나와 007 작전으로 불리는 유명한 비화가 있는데, 1993년 말 김재..
LG 트윈스의 유격수. 등번호는 6번. 별명은 꾀돌이. 충암고-한양대 출신이다. 서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유격수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리틀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뽑혔고, 이종범과 함께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격수로 발돋움했다. 특히 김재박이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된 뒤 자타공인 LG 트윈스 최고의 유격수로 아직까지도 많은 이에게 각인되어 있으며, 그의 은퇴 후 권용관, 박경수, 박용근, 오지환 등이 유격수를 맡았으나 그만큼의 임팩트와 스탯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1994년 LG에 1차지명으로 입단하게 되는데, 리틀야구부터 아마 시절 내내 이종범과 함께 최고의 내야수로 각광받았음에도 프로행 직전인 한양대 4학년 당시 어깨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성적이 추락하고 이것이 핸디캡으로 작용해 자신의 가치만 못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