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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의 유격수. 등번호는 6번. 별명은 꾀돌이. 충암고-한양대 출신이다.
서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유격수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리틀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뽑혔고, 이종범과 함께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격수로 발돋움했다.
특히 김재박이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된 뒤 자타공인 LG 트윈스 최고의 유격수로 아직까지도 많은 이에게 각인되어 있으며, 그의 은퇴 후 권용관, 박경수, 박용근, 오지환 등이 유격수를 맡았으나 그만큼의 임팩트와 스탯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1994년 LG에 1차지명으로 입단하게 되는데, 리틀야구부터 아마 시절 내내 이종범과 함께 최고의 내야수로 각광받았음에도 프로행 직전인 한양대 4학년 당시 어깨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성적이 추락하고 이것이 핸디캡으로 작용해 자신의 가치만 못한 7천5백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다. 연세대행이 확정됐음에도 온갖 공을 들여 가로채어 온 입단 동기 김재현의 계약금은 1억원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부분. 그러나 그는 신인 데뷔와 동시에 주전 리드오프를 꿰차며 LG의 돌풍을 주도했고 그 해 태평양 돌핀스를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이 해 .305-15홈런-51도루를 기록하며 신인 최초 20-20클럽의 김재현, 타율 3할1푼, 신인 최초 사이클링히트의 서용빈을 제치고 94년 신인왕에 등극했다.
1990년대 전성기를 달리던 LG 타선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전성기의 유지현은 1번 타자의 교과서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대 팀 입장에서는 정말 죽이고 싶도록 얄미웠던 선수였을 것이다. 꾀돌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특히 고 하일성 위원 등 대부분 해설위원이 유지현의 야구 지능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었을 정도로, 김재박과 같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영리한 야구를 했던 선수다. 약해진 어깨로 10시즌을 유격수-1번타자 역할을 했으니 체력이 마냥 약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공을 오래 보고 투구수를 늘리기 위해 초구는 그냥 흘려보내곤 했는데 이를 의식한 상대 배터리가 초구를 대충 던지면 그대로 잡아당겨서 잠실 좌측 펜스(유지현존이라고 불린다)를 살짝 넘겨버리는가 하면, 출루해 놓고 도루를 할듯 안할 듯 하면서 상대 투수를 괴롭히는 등의 영악한 플레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차라리 아예 이종범처럼 도루해 버리는 게 상대 입장에선 편했다고 한다.
작은 체구 덕분에 적용되는 스트라이크 존도 좁았고 타격시 몸을 웅크리는 버릇 덕분에 존은 더 좁아졌고 거기에 훌륭한 선구안과 발군의 커트 실력이 갖춰져서 2스트라이크 노볼의 볼 카운트를 2스트라이크 3볼로 만들던 건 예사였다. 그 덕분에 클린업도 아닌 선수가 한 시즌 평균 볼넷이 60여개에 2할 후반대인 통산 타율에 비해 통산 출루율은 3할 중후반대였다. 유격수 수비도 준수했다. 다만 어깨가 약한 편이여서 훌륭한 1루 수비를 자랑했던 서용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 선수들로 유지현을 나타내자면 대충 이용규의 커트+이대형의 발+손시헌의 수비+이종욱의 타격+정근우의 센스를 갖춘 선수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한 마디로 리드오프로서 필요한 장점은 모두 갖춘 선수로, 그의 높은 출루율과 찬스에 강한 면모를 볼 때 LG의 "신바람 야구"라는 팀 컬러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가 주로 출전한 1994-2002 9시즌 중 LG는 1996,1999,2001년을 제외하고 모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1회 우승, 3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94년 신인왕을 수상했음에도 유격수부문 골든글러브는 그해 84도루와 0.393을 기록한 바람같은 분에게 내주고 만다. 1995년에도 매 경기 1994년 이상의 활약을 보여 주었으나 방위 복무로 인해 일부 홈경기만 출전할 수 있었던 탓에, 골든 글러브는 그해 우승 팀인 OB의 김민호에게 돌아갔다. 1997년, 감독추천으로 출장한 올스타전에서 MVP가 되었고, 이종범이 떠난 1998년과 1999년에 드디어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을 수상하게 된다. 이처럼 전성기에 이종범이라는 벽에 가려 그의 천재성은 늘 2인자라는 수식어로 점철되어야만 했다.
공격력은 이종범보다 부족했지만, 수술로 인해 약해진 어깨에도 불구하고 수비력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약한 어깨를 풋워크와 한박자 빠른 타구 판단으로 커버했고 특히 2루쪽으로 쏠리는 타구의 경우 슬라이딩 후 역모션 송구 등 서커스에 가까운 명장면들을 자주 연출했다. 수비 측면에서는 어깨에 의존하는 이종범보다 오히려 기술적으로 김재박-류중일의 계보를 있는 정통 유격수라고 볼 수 있다. 1995 한일 슈퍼게임이 마지막이었으나, 유지현과 이종범은 국가대표로 함께 나갈 경우 공수주를 모두 겸비한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혔다. 유지현-이종범-박정태가 아마에 공존하던 시기에는 3루 유지현-유격 이종범-2루 박정태의 포메이션이 나오기도 했다. (이때는 유지현 부상 전으로 강견 시절) 유격수 수비로는 전문가들도 이종범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유지현에 대해서는 간간이 힘에 부치는 3-유간 상황의 원바운드 송구만 빼면 타구 판단에 이은 풋워크, 다이빙, 글러브질 등 극찬하는 편이며 논란의 여지가 적은 편. 오히려 본인이 아닌 이종범 항목에 유지현과의 수비력 비교에 대한 언급이 더 많다.
사실 LG가 리그를 평정하던 1994, 1995년 후 해태가 1996, 1997년에 살아나면서 자연스레 양팀간 더비가 리그 최고 빅매치가 되었고, 이 둘은 같은 포지션에 둘 다 야구 지능이 높았고 각 팀의 리드오프로서 항상 비교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유지현과 이종범은 2006년 WBC에서 이들은 대표팀 코치와 주장으로서 재회하게 된다. 1루에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이 웬지 짠할 수 밖에 없다.
이종범이 주니치로 떠나기 무섭게 골든글러브 2연패를 했고, 박정태와 키스톤 콤비를 이룬 1999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훌륭한 호흡을 자랑하며 나란히 베스트 포지션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때 획득한 출전권으로 이듬해 열린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 유격수로 출전이 예상되었으나, 대회 직전 대표팀 감독이 주성로에서 김응용으로 변경되며 주전 유격수로 박진만, 내야 백업으로 김태균을 대신 선발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대표팀이 동메달을 획득하며 이런 논란은 자취를 감췄고, 유지현은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분풀이 맹활약을 펼치며 2승 1패로 두산에 리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이기는 날은 스포츠신문 1면에 나왔다. 그러나 엘지는 마무리 장문석의 연이은 블론 세이브로 이후 3연패하며 허망하게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이광은 감독의 해임 및 김성근 감독의 부임 후 2001년부터 2루수-유격수를 보기 번갈아 보기 시작했고 2002년에는 완전히 2루수로 전향해 3할1푼의 타율을 기록함과 동시에 여전히 준수한 리드오프 역할을 수행하여 팀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기여했다.
아마 시절부터 실력으로 국가대표 고정 멤버였던 덕에 유독 포스트시즌같은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것이 유지현 존으로 날려보낸 1997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의 역전 만루홈런(상대투수 성준), 02년 한국시리즈 2차전 6회 임창용 상대 안타 및 도루 시전으로 역전 시발점 역할, 5차전 6회 2사에서 전병호 상대 2루타 및 3루 도루, 패스트볼로 득점 등 팀이 정말 필요한 순간에 깨알같은 안타와 도루를 시전하며 팬들로 하여금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통산 홈런은 적지만 특히 중요한 순간에 잡아당기는 2루타 코스의 타구를 잘 쳐냈다.
입단 동기인 김재현과는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하다. 안그래도 등번호(김재박의 7번), 계약금 등 문제로 입단 때부터 자존심 차원의 갈등을 빚어 사이가 좋다고는 말 못하는 관계였다가, 김재현이 선수협에 적극적으로 가담을 할 때 유지현은 구단 편을 들어서 크게 틀어진 것. 정작 유지현도 LG 구단이 선수협에 가담한 선수들의 연봉 삭감, 징계성 트레이드를 보다 못하여 LG선수 전원을 선수협에 가입시키고, 본인도 2001년에 가입했다. 결국 이것과 2002년 연봉조정 승리까지 겹치며 구단과 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003년 타율이 2할대 초반에 머무르는 등 극도의 슬럼프의 빠지게 되는데, 은사인 이광환감독은 유지현을 2루수로 전향시켜가며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고 하필 이 슬럼프 시점에 찾아온 FA계약 때 1년 4억원이라는, 유지현이라는 존재 가치에 너무도 격에 맞지 않는 처우를 받기에 이른다. 유지현은 은퇴 이후, FA 계약 당시 원인불명의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있었음을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몸상태가 정상이 아닌 상황에 2004년 금지어가 LG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고, 유지현은 슬럼프에서 재기할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애매하게 1군에 끌려다니며 후배들의 도우미 역할을 맡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때 컨디션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고 무리하게 유격수로 기용하여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을 핑계로 도태되게 만드는 식의 운영을 하였다. 특히 신인 내야수 박경수에게 사실상 반 강제로 주전 자리를 내주고 인스트럭터 역할을 코칭스태프와 구단으로부터 사실상 강요받으며 그해 가을 현역 은퇴 선언을 하였고, 10월 5일 롯데전 클리닝타임 때 약 20분 간 은퇴식을 가졌다. 은퇴식에서 김재현과 조우하는 장면은, 둘 사이의 관계를 떠나 동병상련에 처한 두 사람의 화해와 같이 비춰졌고, 많은 LG 팬들의 안타까움과 공분을 샀다. 이처럼 불운한 선수 말년으로 인해 본인의 가치와 재능에 비해 이후 끊임없이 저평가되는 계기가 된다. 유지현의 은퇴 직후 한화에 부임하여 팀 리빌딩 중이던 김인식 감독이 유지현을 안타깝게 여겨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현역 복귀 오퍼를 한 일화도 유명하다.
여담으로 홈으로 사용한 잠실에서 친 홈런이 원정경기 홈런보다 오히려 많았다. 당시는 95m로 5m 팬스를 당겼었는데, 폴대쪽으로 최대한 잡아당겨 살짝 넘어가는 홈런을 많이 쳤던 것. 신인시절 커리어하이인 15홈런을 기록했는데 이 중 11개가 잠실에서 넘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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