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1990년대 LG 트윈스의 신바람야구를 상징하는 선수이자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했던 좌완 파이어볼러. 


대한민국 투수 중에서 구대성, 박찬호, 김병현, 임창용, 오승환과 함께 '한, 미, 일 프로 무대를 모두 경험한 선수이자, 한미일 3개국 프로야구 1군 경기에 모두 등판했던 최초의 선수이다. 구대성은 2005년 미국에 진출하며 이 기록을 달성했고 박찬호는 2012년, 임창용은 2013년, 오승환은 2016년이었다. 김병현은 일본에서 1군 기록이 없다. 지진만 맞았다 아울러 한미일 3개국 1군 무대에 모두 섰던 날 기준으로 유일하게 만으로 20대에 달성하였다. 


등번호는 47번(LG 1993~1997, 2002~2003 & SK 2004) - 17번(주니치) - 40번(보스턴). 선수로 활동했던 11년 중 대한민국에서 뛰었던 기간은 6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렬한 임팩트로 인해 LG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이다.


고려대학교 4학년이던 1992년 대학야구 춘계리그 때 성균관대학교와의 경기에서 무려 14타자 연속 탈삼진 이란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우며 단박에 서울 연고 프로 팀의 영입 0순위로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도 지옥에서라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였기 때문이다. LG 트윈스와 OB 베어스가 이상훈을 영입하기 위해 치열한 혈전을 벌였지만 결국 이상훈의 향방은 주사위 승부로 결정되었고 승자는 LG였다. 이 때 주사위를 던진 OB의 김현홍 스카우트는 2016년 LG의 스카우트 팀장을 맡았다. 서울 지역 드래프트 우선권을 얻은 LG 트윈스가 그를 1차 지명하면서 이상훈은 1993년 프로야구 역대 최초로 2억 원이라는 몸값에(계약금 1억 8천 8백만원, 연봉 1천 2백만원) LG 유니폼을 입었다. 이 때 에피소드로 LG 스카우트가 구단에 전화로 "우리가 이상훈을 잡았다"며 흥분하면서 낭보를 전하고 있는데 당시 KBO 이상훈 총재가 그 스카우트에게 "날 잡아서 뭐 어쩌려는 거냐"면서 농담했다고 한다.



데뷔 첫 해인 1993년에는 9승을 거두며 아쉽게 두 자리 승수엔 미치지 못했지만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공헌했고,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탈락 직전의 팀을 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다만, 93년은 워낙 대어급 신인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시즌이어서 9승밖에 올리지 못한 이상훈은 신인왕 후보 5명 안에조차 들지 못했다.


이듬해인 1994년에는 김태원-정삼흠과 선발 삼두마차를 이루며 1선발로 맹활약, 18승으로 조계현과 공동 다승왕에 올랐고 LG가 그 해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1등 공신으로 남았다. 골든 글러브를 수상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성적이었지만, 그 해 태평양 돌핀스 소속으로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40세이브를 올린 마무리 투수 정명원의 임팩트에 밀려 아쉽게 수상에는 실패했다.


1995년에도 20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그의 20승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있었다가, 그로부터 훗날 22년 뒤, KIA 타이거즈의 양현종이 20승 5패를 기록하며 토종 좌완 선발 20승 투수로서 두 번째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그렇지만 MVP는 OB 외야수 김상호에게 넘겨 주었으며, 본인도 롯데 자이언츠와 맞붙었던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찌 됐건 1995년의 이상훈은 1998년의 김용수, 2001년의 신윤호와 같이 단 한명도 나오지 않은 LG 출신 MVP에 근접했던 선수였다. OB 베어스의 김상진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여, 둘의 선발 대결이 있다고 하면 매진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역대 전적은 이상훈의 3:0 압승이었다.



포스트 시즌에서의 부진과 달리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나온 1995년 2회 한일 슈퍼게임의 1, 5차전에 선발 등판해서 일본프로야구 올스타 팀을 상대로 12이닝 1실점이라는 엄청난 호투를 펼치기도 했다. 특히 1차전은 일본도 전력을 기울인 베스트 멤버였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인 피칭이었고 일본과 상당한 수준 차이를 느껴야 했던 1991년 1회 대회에 비교해서 대한민국이 일본과도 비등한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1등 공신. 그래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차전 선발 등판 전 일본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일본 기자들이 선동열에게 "1차전 선발을 맡느냐?" 물었을 때 선동열은 "올해 대한민국에 20승 투수가 있다. 그에게 물어 보라!" 고 나름 멋진 대답을 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7이닝 가까이 무실점으로 일본 타선을 틀어막았는데, 안타를 많이 주지 않은 제구가 상당히 잘 된 경기어서 선동열의 대답을 증명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1995년 페넌트레이스 4일 등판 - 포스트시즌 - 한일 슈퍼게임까지 이어지는 혹사의 후유증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1996년 시즌 도중 손가락 혈행 장애와 함께 원래 있었다던 척추분리증까지 발병하면서 더 이상 선발로 출전이 힘들어지며 마무리인 김용수와 보직을 맞바꿔 중간계투 및 마무리로 활약했다. 본격적으로 마무리로 돌아선 1997년에는 10승과 37세이브로 47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면서 구원왕 타이틀 홀더가 되었다. 이는 당시 정명원이 보유하고 있던 한 시즌 세이브포인트 기록을 깬 신기록이었으며, 이후 진필중에 의해 기록은 다시 깨졌다.



방출 후 KBO 리그 복귀 의사를 타진했고, 김성근 감독이 이를 받아들여, 귀국하자마자 친정팀 LG와 연봉 4억 7000만원에 계약하며 고국에 리턴하게 된다. 그 와중에 애꿎은 김성근을 낙마시켜 버리는데, 김성근과 이상훈 조합도 충분히 유효했을 것이고 두 당사자 모두 납득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상훈과의 계약(이광환 감독의 복귀)을 준수하기 위한 LG 프런트의 과감한 결단력이 아이러니하게도 효력을 발휘한 덕분이다. 2002년의 말도 안 되는 LG 트윈스의 전력으로 준우승을 해낸 김성근 감독이 해임된 이유는 'LG가 추구하는 야구 스타일이 아니다'였다. 하지만 이광환 감독도 2003년 감독 후 1년 만에 짤렸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이미 많이 지친 몸을 이끌고 3경기 연속 등판하는 투혼을 보였으나 결국 시리즈 전적 2:3으로 뒤지고 있던 6차전에 9:6으로 앞서던 9회 말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맞은 후 강판당했고, 뒤이어 등판한 최원호가 곧바로 마해영에게 역전 끝내기 백투백 홈런을 내주면서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마운드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 최원호의 마지막 모습 이후 LG는 10년 동안 가을야구를 맛보지 못했고, 강산이 한 번 변하고 나서야 김기태가 다시 가을야구를 실현시켰다.



이후 2003년 시즌을 앞두고 무려 6억이라는 연봉을 받으며 삼성 이승엽에 이은 리그 연봉 2위이자 투수 최고연봉을 받게 되었고 투수로써는 드물게 팀의 주장을 맡았다. 시즌 초 노장진, 조웅천과 함께 구원왕 자리를 다투다가 시즌 중반기부터 슬슬 맞아나가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9월 중 어깨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다. 그리고 이게 이상훈이 현역 선수로써 LG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나온 마지막이 되었다.


2004년 초 스프링캠프 기타 파동으로 인해 이순철 감독과의 트러블을 빚었고, 오승준과 양현석을 상대로 SK 와이번스에 트레이드되었다. 초반에는 괜찮은 공을 던졌으나 이내 급격한 부진에 빠졌고, 결국 친정 팀 LG를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다며 6억이나 되는 연봉을 포기하고 과감히 은퇴했다. 이 때문에 조범현이 구상했던 조웅천과의 더블 스토퍼 체제가 붕괴되면서 이 해 SK 와이번스는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다. 물론 이상훈의 기량이 완연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상훈&조웅천 더블 스토퍼 체제의 붕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응형
댓글
공지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