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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택과 함께 유이하게 LG 트윈스의 암흑기 시작과 끝을 버텨낸 프랜차이즈 스타다. LG 트윈스에서만 통산 700경기에 출장한 유일한 우완투수이자 원 클럽 맨으로 한 때 전설로 불리던 메이저리거 로저 클레멘스의 묵직한 강속구와 투구폼이 닮았다고 하여 '로켓'이란 별명을 가지게 됐다.

 

본래 영남중학교 때까지 외야수였고 서울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투수로 전향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경기고등학교의 야구명문 부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학하게 됐는데, 언더핸드에서 정통파 오버핸드로 투구 폼까지 교정하면서 곧 전국 레벨의 투수로 성장하게 되면서 경기고 2학년 때인 1999년에 박찬호 야구 장학금도 받게 됐다고 한다.

 

이동현의 원 맨 팀이나 다름없던 경기고등학교는 그가 3학년이던 2000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100년만에 메이저 대회 우승의 숙원을 풀었고 이동현은 이 대회에서 MVP와 우수 투수상을 차지했다. 같은 해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우승과 타격상 등 맹활약으로 2000년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김태균, 이대호, 추신수, 정근우 등과 차출되어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IBAF 청소년야구대회의 우승을 이끌어내며 제2의 황금세대, 또는 에드먼턴 키즈의 일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졸업 후 프로지명 당시 서울 연고 야구단이었던 LG와 두산이 경쟁했고 LG 트윈스가 3억 계약을 따내면서 이동현은 LG 트윈스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2001년 LG 소속으로 프로 무대를 밟게 된 이동현은 당시 양준혁, 이병규, 김재현 등이 있던 막강 타선에 비해 김용수 은퇴와 기존 선발진이었던 장문석, 최향남, 최원호 등의 전력 이탈로 약해져있던 투수진을 메꾸기 위해 강하게 성장할 수 밖에 없었다. 고졸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개막전 선발 출장을 포함하여 총 33경기에 출장했고 그 중 19경기에 선발로 출장했다. 최종 기록은 4승 6패 평균자책점 5.37 이었다

 

한 시즌 동안 적응기를 거친 이동현은 2년차 징크스도 없이 대활약했다. 2002 시즌 초반에는 전 시즌 혹사여파로 신윤호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마무리로, 이상훈이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중간계투로 활약하는 등 전천후 불펜으로 뛰면서 8승 3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67을 기록했다. 특히 78경기는 2002 시즌 팀 내 최다 출장 기록이었다.

불펜 투수가 124이닝을 던졌으며 이중 선발 투수로 등판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런 이동현의 눈부신 혹사활약에 힘입어서 2002년 리그 방어율 10위권 내의 투수가 단 한 명도 없었던 LG는 팀 평균자책점은 리그 3위를 기록했고, 4위로 턱걸이한 포스트시즌에서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특히 이 포스트시즌에서 이동현의 활약은 눈부셨는데, 진통제를 맞아 가며 위기상황마다 등판하면서도 10경기 3승 평균자책점 1.99로 역투했다. 그리고 이동현은 이 때의 활약은 LG 팬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을 줬다.

 

하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버텼던 LG 트윈스는 6차전에서 이승엽과 마해영에게 백투백 끝내기 홈런을 얻어맞았고, 그렇게 이동현의 데뷔 첫 한국시리즈는 끝났다. 이후 KBS N 스포츠의 다큐멘터리인 더 레전드 이상훈편 인터뷰에서 이동현은 2002 KS 6차전 때 불펜 임무를 마친 후 탈진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다가 큰 소리를 듣고 깼는데, 그 때서야 상황을 뒤늦게 파악했다고 한다.

 

2003년에는 새 감독 이광환에 의해서 선발로 전환하였으나, 33경기 4승 10패 평균자책점 4.05의 그다지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고 2004년에는 새 감독 이순철과의 마찰로 인해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된 이상훈과 FA로 영입한 진필중의 부진으로 구멍난 마무리 자리를 맡아 48경기 1승 3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2.87로 합격점의 활약을 보였다.

 

이렇듯 데뷔 초반부터 맹활약을 펼치면서 팬들을 설레게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혹사가 지속된 탓에 활약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4년 8월 팔꿈치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갔는데, 이 때부터 장장 5년의 끔찍한 수술 재활 사이클이 시작됐다.

 

2004년 12월에 첫 번째 토미 존 수술을 받았는데 당시 LG 감독이었던 이순철은 8개월 만에 그를 실전에서 쓰기 위해 무리한 재활을 지시, 결국 제대로 복귀도 못한채 또 팔꿈치가 망가진 이동현은 겨우 1년 만에 2번째 팔꿈치 인대 수술을 받았다. 그 뒤 공익근무로 복무를 하기도 하며 시간이 흐른 뒤 2007년 1월 LG의 스프링캠프에 합류하여 훈련을 시작했는데 인대가 또 늘어났다. 이 때 야구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주위의 도움과 그 자신의 굳은 의지로 결국 2007년 11월에 3번째 팔꿈치 인대 수술을 받는다.

 

 

이후 다시 약 2년간의 재활을 거쳐 마침내 2009년 5월 20일 무등 KIA전 마운드에 복귀하게 됐다. 최고 구속은 138km/h이었지만 기나긴 시련을 딛고 재기한만큼 인상깊은 순간이었다. 2009 시즌에는 34경기에 나와 1승과 평균자책점 5.23을 기록했지만, 성적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 일단은 성공적으로 복귀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아니, 그냥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로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리고 2010 시즌, 셋업맨으로 활약하며 오상민, 김광수 등과 함께 LG 불펜의 필승조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시즌 초반에는 LG로서는 꿈 같은 이야기인 막강한 불펜을 형성하며 팀 내 핵심 선수가 되었다. 일시적으로 마무리 역할도 하면서 68경기 7승 3패 4세이브 15홀드 평균자책점 3.53으로 성공적인 복귀를 신고했다. 이 때 '내 마지막 남은 인대는 LG에 바치겠다'는 명언을 남겨 2002년 한국시리즈 이후에 다시 한 번 LG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성공적인 복귀 시즌 이후 간혹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점점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면서 기복을 줄여 승리조로 자리를 잡아가는 이동현과는 별개로 LG 트윈스는 2002년 이후 가을야구를 진출하지 못하면서 야구팬들의 조롱을 받고 있었다. 박용택과 함께 팀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던 이동현에게는 현역 복귀보다 더 큰 숙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LG 트윈스의 가을 야구 진출이었다.

 

투수코치 차명석과 함께 시작한 역사적인 2013 시즌, 이동현은 정현욱, 유원상 등과 함께 불펜을 이끌면서 64경기 72이닝 6승 3패 1세이브 25홀드(2위) 53탈삼진 ERA 3.00 FIP 3.81로 리그 정상급 우완 중간투수의 성적을 보여주면서 LG의 11년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뤄내고 말았다. 정규시즌 2위가 확정되는 경기에서 박용택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그간의 설움을 털어낸 이동현은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3⅔이닝 2피안타 1탈삼진 1실점 비자책점으로 역투했지만 아쉬운 1패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탈락했다. 

 

2013 시즌 이후 팀에 헌신한만큼 연봉이 얼마나 오를지에 엘지팬들의 관심이 모였었다. 거의 대부분의 LG팬들은 팀의 성적도 잘 나왔고 본인의 성적도 좋은 만큼 연봉이 대폭 오르기를 기대했지만 겨우 100% 오른 1억 7천만 원에 도장을 찍었다. 당연히 이 소식을 접한 엘지팬들은 그렇게 고생한 선수한테 연봉 올려주는 게 아깝냐며 프런트를 깠다.

이동현은 2014년에도 61경기 모두 구원 투수로 등판하여 59⅓이닝 5승 1패 2세이브 23홀드(3위) 4블론세이브, 평균자책점 2.73, 피안타율 .257의 성적을 기록하여 제몫을 다했다. 특히 LG 트윈스가 하위권에서 4위로 올라선 기적의 후반기에 23경기 21이닝 3승 1세이브 12홀드, 평균자책점 0.43, 피안타율 .205의 완벽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2014년 포스트시즌에서는 8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4⅓이닝 2홀드 88투구수 4피안타 2볼넷 4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2.08을 기록하면서 2013년 포스트시즌보다 나은 모습도 보여줬다. 이후 2015 시즌은 5승 5패 4세이브 11홀드 ERA 4.40으로 시즌을 마쳤으나 운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2015 시즌 후 FA를 신청해 3년 총액 30억 원으로 LG와 재계약을 맺었다.

 

FA 계약 이후 2016~2017 시즌은 꾸준히 1군 등판을 하며 타고투저의 리그에서 투혼을 불살랐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없었고 2018 시즌은 전반기 이후 구위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2019 시즌에는 연봉이 6억에서 1억으로 대폭 삭감되기까지 했다.

 

 

이후 1군에 오르지 못하고 2군 경기에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다가 결국 후반기에 첫 1군 등판이 이루어졌는데 관록을 보여주면서 1⅔이닝 2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8월 22일 잠실 야구장 NC 다이노스 경기 8회 세번째 투수로 등판하여이닝을 무실점으로 마무리 지으면서 통산 7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이닝을 마치고 덕아웃으로 들어와 그 동안의 고생이 생각나서였는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고 다음날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면서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구단도 만류하고 팬들도 아쉬워했지만 이동현 본인이 마지막 인대는 아들을 위해 써야할 것 같다면서 본인의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남기면서 은퇴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2019년 9월 29일 잠실야구장 두산베어스 16차전으로 은퇴식이 결정됐다. 701번째이자 마지막 경기의 시구는 이동현 투수의 부친이 포수 자리에 앉은 이동현에게 던지는 것으로 꾸며졌다. 은퇴 경기 등판은 7회 초에 이뤄졌다. 팀이 뒤지고 있던 7회 초 마운드에 올라온 이동현은 박세혁을 삼진 처리하면서 19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이 날의 임시 투수코치는 바로 박용택이었으며 두 선수가 껴안는 장면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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