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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의 암흑기에 홀로 투수진을 이끌었던 에이스다. 메이저리그 유턴파로 LG 트윈스에서뿐만 아니라 국가대표로써도 맹활약을 펼쳐 '봉의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봉중근은 신일고 시절 투수로서 뿐 아니라 타자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선수였다. 1997년에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4게임 연속 홈런, 타율 5할을 기록하며 최우수선수가 되었다. 같은 해 청룡기에서는 타율 .688이라는 기록을 보여주면서 MVP, 타격, 타점왕을 휩쓸기도 했다. 1997년 신일고의 황금 클린업 트리오 봉중근-안치용-김광삼은 국내 4개 대회에서 신일고의 3관왕을 이끌었고 세 명은 최우수타자, 최우수선수, 최우수투수, 대회 MVP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이 놀라운 활약으로 봉중근은 97년 당시 고3의 신분으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 스카웃되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워낙 타격에 출중한 능력을 보여줘서 애틀란타에서는 타자로 키울 생각이었는데 투수로써 좌완에 148km/h에 육박하는 공을 던지는 것을 보고 투수로 전향시켰다. 본인은 당시 어려서 다른 의견을 내고 말고 할 여지가 없었다고 하는데, 훗날 은퇴 전 팀에서 허락한다면 딱 1년만이라도 타자로 전향해보고 싶다고 얘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


2002년부터 선발투수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해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 되는 우여곡절 끝에 2005년 팔꿈치 부상으로 한 해를 통째로 쉬고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이후 LG 트윈스에 입단했다.

LG 트윈스는 당시 이상훈의 배번이던 47번을 부여해주는 등 큰 기대를 걸었지만 2007년에는 초반에 활약하다가 후반들어 기대하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워낙 LG 트윈스의 당시 전력이 안좋았기 때문에 그런 LG 트윈스를 봉중근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해 벌어진 당연한 일이었다.

2007년도 기대치 이하의 성적으로 인해 연봉이 1억이나 깎이는 등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2008 시즌부터는 LG 마운드의 당당한 에이스가 되었다. 하지만 팀 전력이 바닥이었던 시즌이었기 때문에 8이닝을 무실점으로 던지고 내려가도 9회에 역전당하는 가슴아픈 순간을 자주 겪었다. 평균자책점 2.66의 뛰어난 호투에도 불구하고 승수는 11승으로 겨우 두자리를 넘겼고 8패나 당하는 바람에 봉크라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소속팀에서의 활약으로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되기도 했지만 성적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2009년에 다시 국가대표로 선발됐고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과의 예선 2차전에서 본인이 지망해 선발투수로 출전 일본을 상대로 압도적인 투구를 보여줘 네티즌들에게 엄청난 찬양을 받았다. 특히 일본의 자존심이라고도 할 수 있던 이치로를 상대로 보여준 두차례에 걸친 견제구 동작으로 이치로가 슬라이딩을 할 정도로 당황스럽게 만들던 모습이 백미였다. 경기 후 팬들은 안중근 의사와 이름이 같은 것을 빗대서 의사 봉중근이란 별명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이후 들어간 시즌에서도 빼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헐거운 불펜과 타선의 도움으로 여전히 승수는 챙기지 못했고 8월 경에 팔꿈치 이상까지 생겨 시즌 아웃하게 됐다. 팀 전력이 약하던 LG 트윈스에서 홀로 에이스 역할을 수행하면서 비시즌에도 휴식없이 2년 연속 국가대표로 차출되었던 게 결국 탈이 난 것이다. 그런데 LG 트윈스에서는 팀 성적 등을 이유로 연봉을 동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봉중근에게 더욱 상처를 줬다. 

2010년에도 전지훈련 중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는 등 시작이 좋지 못했지만 서서히 페이스를 살려 결국 최종성적은 178⅓이닝 10승 9패 평균자책점 3.58, 탈삼진 130개으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줬다. 3년간 혹사와 부상에서도 팀에서 유일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줬고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국가대표 주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2011 시즌부터 결국 몸에 무리가 많이 가서 성적이 좋지 못했는데 초반 팀 분위기가 좋았을 때 보탬을 주고 싶다는 이유로 부상을 숨기고 무리하면서 던졌고 결국 그동안 안 좋았던 팔꿈치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하게 되면서 시즌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재활에 들어간 봉중근은 2012 시즌부터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이전 같은 선발이 아니라 불펜에서 관리를 받으면서 실전 피칭을 이어갔다. 결국 2012 시즌에 마무리 전업을 선언하고 2013년부터 본격적인 마무리로 등판하기로 한다. 

봉중근의 마무리 전환으로 LG 트윈스는 그동안 불안했던 팀의 뒷문을 확실히 잠궈줄 선수가 생겼고 그 영향으로 다른 불펜 선수들과 선발 투수들도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봉중근의 마무리 전환은 LG 트윈스가 2013년도 11년만에 10년연속 진출하지 못했던 암흑기를 깨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게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단지 11년만의 포스트진출 뿐만이 아니라 페넌트레이스에서는 1위팀을 위협하던 2위라는 빼어난 성적을 내게 만들었다.

 

특히 2-4위까지 순위가 결정되는 시즌 마지막 살떨리는 경기에서 두산을 상대로 세이브를 얻어내면서 LG 트윈스 16년만의 정규시즌 2위와 시즌 38세이브를 만들어냈고 이 38세이브로 기존에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이상훈이 가지고 있던 한시즌 최다 세이브 투수 기록마저 깨버렸다. 비록 LG 트윈스는 플레이오프 직행에도 경험부족을 보여주면서 광탈했지만 봉중근은 그간의 암흑기에서 이뤄내지 못했던 개인 첫 포스트시즌 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다. 

팀은 봉중근이 마무리로 활약한 2014년에도 불펜의 힘으로 기적같은 페이스를 보여주면서 2년 연속 포스트진출의 성적을 올렸고 준플레이오프에서 세이브를 올리면서 팀이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힘을 보탰다. 하지만 연봉은 이번에도 동결되었는데 타 팀 팬들도 어이없어 할 정도였다.

 


 

2년 연속 팀의 마무리로 맹활약하면서 팀의 암흑기를 끊어냈지만 2015 시즌부터는 구속이 떨어지면서 이전처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즌을 치루면서 구속은 조금 회복했지만 이전처럼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봉중근이 마무리로서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주자 팀성적도 점차 하락해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통산 100세이브를 올리는 등 기록은 이어갔지만 예전의 좋은 폼은 회복하지 못했고 2016 시즌 선발전환을 시도했지만 부상으로 인해서 제대로 등판하지 못했고 후반기에 선발 복귀해서 팀의 4위 싸움에 도움을 주긴 했지만 완벽한 부활은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정규시즌에서는 10월 4일 삼성전, 그해 포스트시즌에서는 10월 14일 넥센과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을 마지막으로 현역 1군 마지막 등판이 되버렸다.

 


시즌 후 FA 자격을 취득해 LG 트윈스와 2년 15억원에 FA계약을 체결했지만 어깨 부상으로 인해 수술을 받으면서 재활 기간으로 2017시즌이 지나갔고 2018시즌도 1군 콜업 통보를 받았지만 2군 등판에서 나서 인대 파열 부상을 당해버렸다. 봉중근은 1군 복귀를 위해 사이판까지 가서 재활의지를 보였지만 회복 속도는 더뎠고 결국 그동안의 혹사와 여러 번의 수술을 받은 몸에 불혹을 앞둔 나이를 이기지 못했고 2018년 9월 19일 재활을 중단하고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2018년 9월 28일 은퇴식을 가졌고 특유의 견제동작을 한 차례 보여준 후 포수로 김정민 코치를 앉히고 시구를 했다. 캐스터의 말처럼 어깨가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고 그로 인해 전력투구까지는 하지 못했다. 투구 후 김정민 코치와 함께 손으로 하늘과 팬들을 향해 하트를 그리는 등 행복한 모습을 보여줬다. 봉중근은 마지막 고별사에서 후배들이 가을야구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지만 이 날 팀은 경기에서 패해 봉중근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은퇴기사에서 봉중근은 지인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준 팬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번이라도 공을 던져보고 싶다”며 사이드암으로 투구폼까지 바꿔 안간힘을 썼다는 내용을 알려주면서 또 한 번 팬들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또 LG에서 코치로 남고 싶다고 언급해 영원한 LG맨임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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