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레알 마드리드에서 데뷔했으며, 선수 시절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라고 불린 3인 중 한 명이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최다 득점자였으며 라리가 우승 6회, UEFA 챔피언스 리그 3회 우승 등 화려한 클럽 커리어를 자랑한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은퇴 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등장 전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왕이라고 불렸으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라울은 어떻게 팀을 승리로 이끌지 아는 선수였다. 영리한 축구 지능에 득점 감각까지 갖추고 있어 언제나 필요할 때면 골을 터뜨려주었으며 비단 득점 뿐만이 아닌 플레이 메이킹에도 능해, 수비 라인을 파고들어 기회를 노리거나 사냥개처럼 수비수를 물고 늘어지는 등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의 모습도 많이 보여주곤 했다.
비교적 평범한 스피드와 개인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박스 안쪽에서의 감각적인 위치 선정과 다양한 슛 기술, 정확한 피니시 능력으로 해결사 역할을 제대로 해준 선수가 바로 라울이다.
그렇다고 공격에만 가담하고 수비에는 공헌을 하지 않았냐 하면 그건 아니다. 팀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뛰며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는 등 헌신적인 플레이도 여러 차례 보여줬다. 신체조건이 남다르거나 화려한 개인기를 갖고 있는 선수는 아니였지만 축구 자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선수였다.
허나 이 수많은 장점들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은 바로 그의 리더십과 프로 정신이다. 라울은 주장으로서 강인한 멘탈로 무너지는 모습 없이 묵묵히 선수들을 다독이며 소리 없이 팀을 이끌고, 앞장서서 몸을 던져 팀에게 승리를 아껴주었다. 경기장에서의 매너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프로경기에서 한 번도 레드카드를 받은 적이 없다. 이렇듯 그는 팬들에게 있어서도, 팀원들에게 있어서도 주장을 넘어선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였다.
라울은 평범한 노동자 집안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서포터였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틀레티코의 유스 클럽에 입단했으나, 12세 때 아틀레티코가 재정 문제로 유스 클럽을 일시 해체하면서 다른 마드리드의 연고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게 된다. 이 아틀레티코 유스의 붕괴는 레알 마드리드 창단 이래 가장 운이 좋았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입단 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더비에서 데뷔골을 넣는다.
1994년 10월, 레알 사라고사와의 경기에서 클럽 역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인 17세 4개월이라는 어린 나이로 성인 팀 경기에 데뷔한다. 데뷔 시즌인 1994/95 시즌에 9골을 기록하면서 스페인 축구의 미래로 각광받게 되었고 카펠로, 하인케스 등 감독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된다. 처음엔 좌우 날개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위치했으나, 거스 히딩크 감독 휘하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보직을 변경한다.
1998/99 시즌에 25골, 2000/01 시즌에 24골로 득점왕을 거머쥐고, 2000년과 2001년 연속으로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 엄청난 카리스마와 존재감으로 페르난도 이에로 이후 레알 마드리드의 주장이자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1999/2000 시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거의 라울과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 페르난도 레돈도 셋이서 만들어 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주전 선수들의 기량 및 조직력 저하로 인해 라 리가에서 홈에서도 5골을 먹고 패배하며 5위로 추락하던 시절이었다.
전체적인 경기력이 부진했고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도 뮌헨에게 2차례 패배해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등 좋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8강에서 만난 맨유 퍼거슨이 "더 이상 레알 마드리드는 두렵지 않다."며 도발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라울은 퍼거슨의 발언을 들은 뒤 기자회견에 임하며 "다시는 그런 말 내뱉지 못하게 해주겠다." 라며 일갈했고 그 날 경기에서 맨유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며 3:2 승리를 이끌었고 이후 그야말로 초인적인 활약을 이어가면서 결승에서도 팀의 마지막 쐐기골을 기록하며 팀에게 빅 이어를 안겼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 라울은 자신의 스탯과 상관없이 팀이 필요로 하는 장소에서 뛰었다. 실제 라울은 2000/01 시즌 갈락티코스 정책으로 영입한 피구와 마켈렐레와 모리엔테스의 부상으로 좀 더 전진 배치돼 스트라이커 롤을 부여 받았고 구티의 지원을 받아 24골이 넣었다.
이런 골결정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다음 두 시즌 동안 마드리드의 부상에도 돌아온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와 호나우두에게 스코어러의 위치를 넘겨주고 이들을 보조하며 15골에 가까운 기록에 만족했다. 스트라이커로서의 자신의 기록에 대한 욕심을 버리면서 오직 팀을 위해 헌신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잦은 포지션의 변경 때문인지 이후 슬럼프를 겪게 된다. 2003/04 시즌 마드리드는 데이비드 베컴을 영입하는 등 수비로 헌신하는 미드필더가 아닌 공격 위주의 갈락티코스 정책으로 팀의 밸런스가 급격히 무너지자 라울이 미드필드로 내려가게 됐고 그러면서 라울의 득점력은 급감하게 됐다.
이후에도 실속이 없는 영입을 계속 이어간 레알 마드리드는 마이클 오언을 데려온다거나 모리엔테스를 다시 데려온다거나 카사노를 영입한다거나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라울은 아무리 열심히 경기장을 뛰어다니며 팀을 위해 희생해도 팀 성적은 좋아질 수 없었다.
포지션을 상관하지 않고 그야말로 죽어라고 뛰어다녔으나 오히려 시즌이 끝난 후에는 라울의 공격 스탯만을 가지고 하위권 팀의 그저 그런 공격수보다 못하다며 여론의 비난을 받았고 기량 하락에 대한 지적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성적 부진을 이기지 못해 갈락티코스 정책은 해체 수순을 밟았고 라울은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팀에 필요한 자원들이 영입되면서 레알 마드리드는 우승을 이루어낼 수 있었고 특히 판 니스텔로이의 영입은 라울에게 큰 도움이 됐다. 루드-라울이라는 꿈의 투 톱은 뛰어난 호흡을 보였다. 2007/08 시즌 라울은 18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라 리가 우승의 일등 공신이 되었음은 물론 라 리가 MVP의 성격을 띠는 상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상의 초대 수상자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았다.
이 다음 시즌인 08/09시즌에도 18골을 넣으며 클래스를 증명했다. 최강의 전력을 보여주던 FC 바르셀로나를 견제하기 위한 갈락티코스 2기 출범으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림 벤제마, 카카 등 막강한 공격진이 영입됐지만 누가 라울의 파트너가 되느냐가 주 관심사일 정도로 라울의 존재는 확고부동했다.
하지만 2009/10 시즌 후반부터 이과인과 벤제마의 폭발적인 성장에 서서히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다음 시즌 주제 무리뉴 감독이 부임하면서 팀의 주전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아직 자신의 실력이 건재하다고 생각한 라울은 이적을 결심하고 2010년 레알 마드리드에서 FC 샬케 04로 적을 옮기면서 마드리드에서의 커리어를 끝내게 된다.
라울은 샬케에서도 괄목할 만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초반 10경기 가량 라울은 침묵하며 '퇴물인가, 역시 원 클럽 맨이라 적응이 힘든가' 등 억측이 쏟아지는 와중에 어느 순간부터 골이 하나 둘 쏟아지더니 리가에서도 무서운 능력을 과시했다. 살케는 라울의 활약에 힘입어 챔스도 조별 리그를 1위로 통과하고 16강, 8강까지을 넘어 4강까지 올라갔으며, 시즌의 대미는 포칼 우승으로 장식하게 되었다.
이는 9년 만의 우승이었고 이로 인해 유로파 진출권도 따냈기에 샬케로서도 뜻깊지만, 생애 최초로 국내 컵 대회에서 우승 컵을 들어 올린 라울에게도 감격스러운 우승이었다. 특히 헤더 한 방으로 바이에른을 침몰시킨 4강 전 경기는 라울의 진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2011/12 시즌, 감독이 펠릭스 마가트에서 랄프 랑닉으로 바뀐 이후 전술적 변화에 따라 프리 롤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제한된 역할을 부여받았지만 프로답게 계약을 준수하겠다고 선언했고 시즌 내 팀의 중추로 활약하며 리가 17경기에서 10골을 꽂아 넣었다. 이렇게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샬케 팬들에게 레전드 대우를 받기도 했다.
2011/12 시즌 이후 라울은 샬케 04를 떠나서 알 사드로 이적을 하게 된다. 1년 계약이었기 때문에 2014년 레알 마드리드가 라울의 복귀를 추진한다는 기사도 나왔지만 이후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했고 미국에서도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프로에서 은퇴했다.
국대에서의 라울은 커리어가 화려하진 않다. 102경기를 뛰며 44골을 넣었으며 라울의 골 기록은 다비드 비야가 갱신하기 이전까지 스페인 국대 최다 골 기록이었고 2002년 페르난도 이에로의 은퇴 이후 대표 팀 주장도 도맡았다. 하지만 팀 커리어가 이 당시 스페인이 강팀이 아니었고 예선에선 골을 몰아쳤으나 본선에선 부진에 시달리기도 하고 부상을 당하기도 하면서 결정적인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라울은 대표팀에 꾸준히 차출되었지만 별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UEFA 유로 2004에서는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와 멋진 골 장면을 만들어낸 것을 제외하고는 무기력했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주전도 아니었다. 그리고 라울이 클럽에서 완벽하게 부활한 UEFA 유로 2008 시기에는 당시 대표팀과의 전술적인 문제 등의 문제로 출전하지 못했다.
이렇게 국대에서 부진했던 라울도 2002 월드컵에서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다(4경기 3골). 하지만 한국과 맞대결한 8강전에서는 부상 관리라는 명목하에 출전하지 않았다. 아마도 4강과 결승을 생각한 결정이었을 것 같지만 넘치는 여유로움으로 8강에서 탈락했고 당시 라울이 출전했더라면 어땠을까라며 가끔 회자되기도 한다.
갈락티코스 정책으로 인해 유독 이적생들이 많았던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수가 많지 않다. 라울은 그런 레알 마드리드에서 16년간 뛰며 총 741경기에 출장했고 323골을 넣었다. 이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넘어선 당시 레알 마드리드 최고 득점 기록이자 최다 출장 기록이었다.
라 리가에선 총 550경기 228골을 넣어서 통산 5위의 득점을 기록했다. 이는 디 스테파노의 227골을 근소하게 앞선 기록이며 팀의 갈락티코스 정책으로 손해를 본 시즌을 생각해보면 더 대단한 기록이다.
마드리드에서 라울이 남기고 간 업적들은 실로 잊을 수 없는 것들이며, 팬들도 그를 '라울리토'라고 부르며 그 오랜 공헌을 기리고 있다(Raulito, Raul을 스페인식 애칭으로 부르는 표현). El ángel del Madrid(마드리드의 천사) 또는 Raul Madrid(라울+레알 마드리드) 같은 표현도 있을 정도다.
특히 챔피언스리그의 제왕이었다. 데뷔 이래 매년 챔스에 출전하며 142경기로 역대 최다 출장과 득점 기록을 갱신했다. 수많은 스타 공격수들이 수십 년 동안 넘지 못했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마저도 훌쩍 넘어선 71골을 기록했고 챔스와 유로파 리그를 합산해 계산한 '유럽 대항전 최다 골' 랭킹에서도 라울이 77골로 1위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라는 압도적인 선수들이 나타나 놀라운 기록을 세우면서 1위 자리는 모두 빼앗겼지만 이전까지 챔피언스 리그의 제왕은 라울이었다. 라울 그 자체가 기록의 사나이였다고 할 수 있다.
'축구 > 레전드 선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측불가 화려함의 대명사 '외계인' 호나우지뉴 (Ronaldinho) (0) | 2019.08.10 |
---|---|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표본 '최고의 테크니션' 데니스 베르캄프 (Dennis Bergkamp) (0) | 2019.08.10 |
프리미어리그의 전설 아스날 레전드 '킹' 티에리 앙리 (Thierry Henry) (0) | 2019.08.07 |
아트사커의 창시자 그라운드의 마에스트로 지네딘 지단 (Zinedine Zidane) (0) | 2018.04.04 |
폭발적인 스피드를 보여줬던 신축구황제 호나우두 (Ronaldo) (0) | 2018.03.03 |